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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년08월01일 14시1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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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애를 극복한 위인들

◇ 세계적인 시각장애인 피아니스트 니콜라스 콘스탄티니디스

파란 나일강의 색깔만 기억하는 시각장애인 피아니스트 콘스탄티니디스는 인간세계에서의 승리자로 전세계에 알려진 피아니스트이다. 1995년 폴란드에서 열린 국제청소년음악회에서 입상함으로써 세계의 주목을 받기 시작한 그의 연주회는 매번 세계의 주목을 받아 미국교육방송, 영국 BBC, 스위스의 라디오 방송, 독일의 RIAS, 오스트리아의 비엔나 라디오 등에서 중계되었으며, 전세계의 청중들과 비평가들에게 환호를 받았다.

그의 양친은 그리스인이며 이집트 카이로에서 태어났다. 런던 왕립음악학교에서 리센티에트(유럽에서의 학사와 박사의 중간학위)를 받고 졸업한 뒤에 미국 보스턴 왈라스대학에서 장학금을 받았으며 여기서 음악학사를 받고, 클리블랜드 음대에서 음악석사 학위를 받았다. 

바르샤바 콘서바토리의 최우수 디플로마를 받고 또한 쇼팽의 고향인 젤라로와 왈라에서 쇼팽곡으로 된 연주회를 개최하는 영광을 얻기도 한 그는 1969년 미국 최고의 젊은이로 뽑히기도 했다. 어떤 나이와 배경을 가진 청중들과도 쉽게 어우러지는 그에 대한 매력은 세대와 문화의 장벽을 허물었으며 모든 청중에게 환희를 주었다.

4개 국어를 능숙하게 구사했던 그는 자신이 시각장애인이라는 사실을 단지 불편할 뿐이라고 말하곤 했다. 일반의 상식을 깨고 시각장애인으로서 세계적인 피아니스트가 된 그에게 장애는 단지 조건일 뿐인 것이다.

◇ 의자 위의 지휘자 제프리 테이트

의자에 앉아서 지휘봉을 흔드는 지휘자 제프리 테이트. 그는 세계에서 가장 모범적이고 휼륭한 지휘자의 한사람이다. 그는 왼쪽 다리가 마비되어 서 있을 수가 없기 때문에 의자에 않아서 지휘를 하지만 제네바 오페라단 수석 지휘자이며 메트로폴리탄 오페라단의 공연을 지휘하기도 했다.

어려서부터 음악의 천부적 재능을 보여준 그는 배고픈 예술가의 말년을 걱정하는 부모의 권유로 의과대학에 진학하여 인턴수련까지 마쳤다. 하지만 음악을 포기하지 못하고 피아노 연주자로 활동하다 메트로 오페라단 지휘자 레빈의 권유로 지휘를 시작하게 되었다. 결국 그는 오페라에 인생을 걸고 정상을 달리고 있는 것이다.  

◇ '말은 잘 못하지만 거짓말은 안한다'는 크레티앙 총리

얼마 전 한국을 방문한 캐나다의 제20대 총리 장 크레티앙 자유당 당수는 선천적인 장애인이다. 왼쪽 안면 근육마비로 한쪽 귀가 멀고 발음이 불분명한 그는 정치만화가들로부터 회화적 대상이 되기도 한 자신의 신체적 멍에를 딛고 캐나다 선거사상 가장 빛나는 승리를 쟁취한 주인공이다.

그는 30년 정치생활을 '말은 잘 못하는 대신 거짓말은 않는다'는 정직함과 성실함으로 자신의 불리한 조건을 이겨냈다. 그는 선거유세에서도 언어장애와 그로 인한 고통을 솔직히 시인함으로써 오히려 유권자들의 많은 지지를 받았다. 퀘백주 몬트리올 인근 셔위니건의 변호사 출신인 그는 시골호박이라는 별명을 얻을 만큼 수수한 농담과 청바지를 즐기는 소탈한 성품이라고 한다. 연방통합을 강력히 주장하는 그의 소신으로 고향인 퀘백주에서의 인기는 없다. 

63년 스물 아홉살로 하원의원에 당선 정계에 발을 디딘 뒤 68년부터 84년까지 16년간 부총리와 재무, 공업, 법무 등 주요직책을 거쳐 풍부한 행정경험을 가지고 있는 유능한 정치인이라고 한다.

◇ 휠체어를 탄 독일의 2인자 볼프강 쇼이블레

유럽의 한복판에 위치한 인구 8천만의 경제대국, 통일이 되면서 경제력에 걸맞게 정치적 영향력 또한 급속히 신장해 가는 독일, 머지않아 장래에 어쩌면 휠체어를 탄 척수장애인이 그런 독일을 이끌어 갈지 모른다.

독일의 내무장관과 집권당의 원내총무를 지낸 볼프강 쇼이블레가 바로 그 주인공이다. 독일의 원내총무는 수상 다음의 중책으로 수상직에 오르는 마지막 정류장이다. 원내총무로 선출되던 날 콜 수상은 휠체어를 타고 회의장을 나오는 쇼이블레의 손에 미국의 옛대통령 루즈벨트의 자서전 한 권을 쥐어 주었다. 이 사실로 독일 내에서는 독일에서의 루즈벨트의 탄생 가능성을 점치고 있다. 원내총무 선출을 계기로 그에 관한 갖가지 눈물겨운 신화들이 쏟아져 나오면서 그의 인기가 하루가 다르게 치솟았다고 한다.

소이블레가 척추장애인이 된 것은 1990년 한 정신병자의 저격을 받고 병원에 입원하고부터다. 당시 내무장관이었던 그는 저격 5일 후 의식을 되찾았으나 의사는 그에게 척추장애인임을 선고한다. 그로부터 그는 최소한 2년은 입원해 있어야 한다는 의사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내무장관직에 복귀했다. 휠체어가 들어갈 자리를 위해 그는 집무실 책상의 서랍을 톱으로 잘라내었고, 하루 17시간의 격무에 들어갔다. 

그의 정계복귀는 그의 동료들뿐만 아니라 독일인들 사이에 커다란 놀라움으로 받아들여졌다. 그의 동료들뿐만 아니라 독일인들 사이에 커다란 놀라움으로 받아들여졌다. 그처럼 심각한 척추장애인이 어떻게 정부 요직의 임무를 해낼 수 있겠느냐는 것이다. 그러나 그는 정치 없는 인생은 한번도 생각해 본 적이 없다고 할 정도로 정치와 권력에 강한 애착을 가지고 있다.

이제 그의 장애가 과연 그의 정치여정에 어떠한 영향을 줄 것인가는 더 두고 볼 일이지만 뚜렷한 목표의식이 있는 한 신체장애가 그 사람의 일생에 결정적인 요인이 되지는 않는다는 것을 우리는 루즈벨트의 예를 통해 익히 알고 있기에 그의 장래도 낙관할 수 있다고 생각된다.

◇ 독일을 대표하는 언어장애 작가 헤르만 헤세

헤르만 헤세는 1877년 남부 독일의 뷔르템베르크의 소도시 칼브에서 태어났다. 신교의 목사인 아버지는 인도에서 선교활동을 한 일이 있으며, 외할아버지는 30여개국의 언어를 구사하는 뛰어난 분이었다. 그의 서재에는 기독교 서적에서부터 그리스 및 라틴의 고전, 인도의 서적 등으로 가득차 있었다.

이러한 모든 것들은 어린 헤세에게 많은 영향을 주었다. 많은 독서의 영향으로 헤세는 어려서부터 동양 종교에 흥미를 느꼈으며 코스모폴리탄적인 평화주의를 지향하게 되었다. 또한 18세기의 독일 문학에 심취하기도 하였는데 소년 헤세는 이렇듯 간접체험을 통해 공상의 나래를 펼쳤다. 

14세가 되자 헤세는 목사가 되기 위해 마울브론 신학교에 입학한다. 하지만 학교 규율을 제대로 지키지 못하여 반년 만에 퇴학당하고 만다. 한편 극도의 신경쇠약으로 자살을 시도하는 등 자폐증으로 시달렸는데 그러한 그도 괴테의 작품을 읽고 나면 마음의 안정을 되찾곤 하였다고 한다. 

한 때는 숙련공이 되려고 기계 공장에서 3년 동안이나 시계 톱니바퀴를 다루는 일을 하기도 하였으나 주위의 비웃음에 그만 두었다. 기계공장을 그만 둔 헤세는 서점의 점원 생활을 시작하였는데 이러한 체험이 소설 '수레바퀴 밑에서'를 낳았다. 

1899년에는 시집 '낭만의 노래'와 '한밤중의 한시간'을 발표했다. 1904년에 쓴 '페터 카멘친트'는 자연 속에서 인간의 애정을 탐구하고 있는데 헤세는 이 작품으로 일약 유명 작가가 되었다. 그 해 아홉 살 연상인 마리아 베르누이와 결혼한 그는 조용한 시골에 파묻혀 오로지 창작에만 몰두했다. 그리하여 1915년에 유명한 '크놀프'를 발표하였다. 1911년 헤세는 결혼 생활에 회의를 느끼고, 싱가포르, 수마트라, 실론 등으로 여행을 떠났다. 그 때 받은 감명들을 글로 옮긴 책이 1922년에 발표된 '싯타르타'이다.

한편 아내의 정신병 악화와 자신의 신경장애 때문에 헤세는 정신과 의사에게 심리요법으로 치료를 받았다. 그 후 정신과 의사의 권유를 받고 프로이드 심리학을 연구한 헤세는 1919년 우리에게 널리 알려져 있는 '데미안'을 완성하였다. 인간의 본성과 이성의 갈등을 그린 '지와 사랑'은 1930년에 발표되었으며 대작 '유리알 유희'는 1943년에 발표되었다.

마침내 1946년 헤세는 노벨문학상을 수상하였다. 그의 시나 소설은 음악적 아름다움을 지니고 있고 그 내용이 명상적이라는 것이 특징이다. 특히 헤세의 작품 속에는 인도의 불교철학이 숨쉬고 있음이 발견된다.

◇ 20세기 가장 인기 있는 작가 중의 한 사람이었던 서머셋 몸

'달과 6펜스'로 유명한 작가 서머셋 몸은 1874년 파리 주재 영국 대사관 고문 변호사의 아들로 파리에서 출생하였다. 8살 때 어머니를 여의고 10살 때는 아버지마저 돌아가시자 몸은 목사인 숙부의 집으로 가서 자라게 된다. 이곳에서 보낸 그의 소년시절은 자전적 소설인 '인간의 굴레'에서 묘사된 것처럼 매우 불행하고 고독했다. 

독일로 유학을 갔던 몸은 그곳에서 생활하면서 예술에 대한 호기심과 문학에 대한 눈은 뜨게 되었다. 그리하여 작가가 되기로 결심을 하고 영국으로 돌아오나 숙부에게는 차마 그의 뜻을 말하지 못한다. 그는 생활을 꾸려나가기 위해 성 토머스 병원의 부속 의과대학에 입학하고 그곳에서 의사자격증을 딴다. 

그는 의대 재학중에 이미 소설을 발표했는데 이것은 그가 런던 빈민굴의 가난한 사람들을 치료하면서 경험했던 느낌을 바탕으로 하여 쓴 것이다. 그 뒤 10년 동안 그는 장편, 단편, 희곡 등 많은 작품을 썼지만 이렇다 할 이름을 얻지는 못하다가 1908년 우연히 희곡 '프레더릭 부인'이 큰 성공을 거둠으로써 이름을 얻었다. 그 후 4년 동안 그는 유명 극작가로서 런던의 사교계를 드나들며 여유로운 생활을 하게 된다.

그러나 1912년경부터는 극작까지 중단하고 자신의 가슴속에 응어리진 어린 시절의 고독과 그의 삶을 소설로 구성하기 시작한다. 그리하여 2년만에 완성한 것이 장편소설 '인간의 굴레'이다. 

1915년에 발표된 이 소설은 발표 당시에는 사람들에게 별 호응을 얻지 못하였다. 그 뒤 '과자와 맥주', '비' 등을 발표하였다가 1919년 폴 고갱을 모델로 하여 쓴 '달과 6펜스'를 발표하여 일약 스타가 되었다. 미국에 이어 프랑스에서 순식간에 베스트 셀러에 오르자 그동안 별 반응을 보이지 않았던 '인간의 굴레'도 새로운 평가를 받게 되었다. 그리고 그것을 기점으로 그의 작가활동의 전성기로 들어간다. 

몸의 최후의 소설은 1948년에 발표한 '캐털리나'로 이후로는 평론집과 편저만 발표하였다. 이 시기에 있어 가장 주목해야 할 작품으로는 무엇보다도 반생에 걸친 인생 노트와 창작 메모 등을 공개한 '작가의 노트'일 것이다. 

◇ 외팔의 드러머 릭 앨런

공간을 터뜨릴 듯 울려대는 록밴드의 음악. 팔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숨가쁘게 드럼을 두들겨야만 하는 록밴드의 드러머가 외팔이라면? 80년대를 풍미했던 영국 헤비메탈 밴드 데프 레파드의 '릭 앨런'은 놀랍게도 왼쪽 팔이 없는 외팔 드러머이다. 앨런은 열다섯살 때인 78년부터 당시 무명밴드였던 데프 레파드에서 스틱(드럼 채)을 잡았다. 

데프 레파드가 세 장의 음반을 연속 히트시키는 동안 드러머 앨런은 힘이 넘치면서도 정교한 리듬의 연주로 명성을 떨쳤다. 앨런에게 불행이 찾아온 것은 84년 12월. 스포츠카 메니아였던 그는 불의의 교통사고를 당해 왼쪽 팔을 어깨부분에서부터 절단해 냈다. 드러머로서 생명이 끝나는가 싶었던 시련이었다.

하지만 데프 레파드가 4년만에 재기 음반을 발표했을 때 그는 여전히 드러머였다. 그는 각고의 노력 끝에 오른팔을 이용하는 특수주법을 익혔던 것이다. 물론 한쪽 팔을 잃고 난 후의 드럼연주는 이전에 비해 아무래도 속도감이 덜어지는게 사실이다. 오른팔만 쓰다보니 자연스레 발도 오른쪽을 많이 쓰게 됐다. 드럼 세트도 북의 숫자를 줄여 보통 드러머가 쓰는 것과 차이가 있지만 연주에는 전혀 어색함이 없다.

앨런의 재기는 단순한 연주의 완성도 차원을 떠나 인간의지의 힘을 보여준다. 새음반 홍보차 한국에 들른 앨런의 다음 한마디는 정말 시사하는 바가 크다고 생각된다. "어려움을 겪어 보지 않은 사람은 인간이 얼마나 강한 존재인지 알기 힘듭니다." 

◇ 소울 음악의 천재 레이찰스

세계에서 가장 유명한 시각장애인으로 일컬어지는 흑인 소울 가수 레이찰스. 그는 공황기에 프로리다 주 흑인 빈민촌에서 성장했는데 다섯 살 때 큰형이 목욕탕에서 익사하는 것을 본 뒤 그 충격으로 시력을 잃었다고 한다.

그 후 미국 전역을 피아노를 벗삼아 방랑하며 소울 가수로서의 명성을 쌓아왔고, '소울의 천재'라는 음악적 명성만큼이나 숱한 화제를 뿌려왔다. 17년에 걸친 헤로인 중독으로 3번에 걸쳐 구속된 것을 비롯하여, 총 일곱명의 여성과 아홉 명의 자녀를 둔 열정의 소유자이기도 하다. 90년대 초 마약을 끓고 정상적인 음악활동을 시작하자 PBS 방송국에서 그의 인생을 다큐영화로 제작할 만큼 파란만장한 삶을 걸어 왔다.

◇ 흑인 팝 음악의 살아있는 신화 스티비 원더

그는 리듬 앤 블루스, 소울 등 미국 흑인들이 창출해 낸 음악 장르를 꽃피운 음악인으로 대중적 인기 뿐만 아니라 음악 전문가들도 그의 천재성에 경탄하고 있다. 

60년 열살의 나이에 본격적인 음악활동을 시작한 그는 흑인 음악의 메카 '모타운' 레코드에 발탁되면서 독창적이면서도 만인이 공감하는 음악을 만들어내기 시작했다. 그는 자신의 노래뿐만 아니라 유명 가수들에게 작곡, 제작을 해주면서 리듬 앤 블루스가 미국 팝송의 중심으로 떠오른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헤아릴 수 없이 많은 그의 독창적인 작품들은 발표할 때마다 그래미상을 석권했으며 펑크, 소울, 프로그레시브 음악과 재즈로도 편곡되는 등 불후의 명곡으로 남아있다. 선청성 시각장애인인 그는 최근에 공연을 통해 인권, 장애인과 관련한 운동의 메시지를 강하게 담고 있다.

◇ 손과 발로 소리를 느끼는 청각장애인 애블린 글래니

50여개의 타악기를 한꺼번에 다루는 청각장애 연주자 애블린 글래니. 그녀는 1년에 120여회의 연주회를 갖는 타악기 연주자이며, 빼어난 미모의 여성이다. 그는 갖가지 타악기로 작은 빗방울 소리부터 천둥소리까지 소화해내며, 자신의 연주를 들을 수는 없지만 발과 손끝에 있는 온갖 신경을 동원하여 소리들을 감지한다.

여덟 살 때 귀에 이상이 생겨 열 두 살 때에 청력을 완전히 상실한 그녀는 스코틀랜드의 농촌 출신이다. 지방 중등학교에서 음악공부를 하던 열 두 살 때 친구의 북치는 모습에 반해 타악기를 시작했다는 그녀는 청력문제로 오케스트라 단원이 될 수 없다고 판단하여 솔로 연주가로 데뷔한다.

수많은 콘서트를 영국에서 가졌고, 미국으로 건너가 뉴욕 필하모니와 협연 연주회도 가졌다. 94년 정상 청력을 가진 레코드 엔지니어와 결혼한 그녀는 인간승리의 한 표상일 뿐만 아니라 청각장애 어린이들의 음악치료법을 지원해주는 '런던 베토벤 기금단체'의 회장으로 활동하고 있다. 

청각장애인이 어떻게 훌륭한 연주를 할 수 있느냐는 주위의 질문에 그녀는 "저는 청각장애인 음악인이 아니에요. 다만 청각에 조금 문제가 생긴 음악가일 뿐이죠"라고 대답한다. 그녀에게도 장애는 단지 조금 불편한 조건일 뿐인 것이다.

◇ 열정적 휠체어 인생으로 새로 태어나는 수퍼맨 크리스토퍼 리브

영화 수퍼맨의 주인공 크리스토퍼 리브의 초인적인 삶에 대한 열정에 미국민들이 경의를 표하고 있다. 미국의 시사주간지 타임지는 리브를 표지인물로 다루고 그가 95년 승마 도중 낙마로 장애인이 된 이후 열정적인 삶을 살고 있다는 점을 크게 소개한 바 있다. 리브는 수퍼맨의 영화배우로서 절정기에 있을 때도 받지 못했던 대접이다. 

리브는 사고 후 전미척수마비협회 이사장을 맡아 척수장애인들을 위한 활동을 활발히 펼치고 있으며 최근에는 장애인올림픽에 모범장애인으로 모습을 드러내기도 했다. 반신불수가 됐음에도 불구하고 리브의 가정이 안정돼 있다는 점도 미국인들이 그를 칭송하는 이유 가운데 하나이다. `92년 결혼한 아내 다나는 사고에도 불구하고 그의 곁은 떠나지 않고 극진히 간호하고 있다. 

"우리는 삶에 있어서 우리가 생각할 수 있는 것보다 훨씬 더 많은 것을 성취할 수 있다."는 리브에 대해 멋쟁이 배우시절보다 더 위대한 인간 드라마를 보여주고 있다는 것이 주변사람들의 평가이다. 

최근에는 미국의 정치인들이 슈퍼맨 살리기 운동을 앞장서 척추부상자의 치료비를 연간 4억 5천만 달러씩 증액해야 한다고 발의했고, 클린턴 대통령은 의회에 추가지원비 1천만 달러를 당당히 요구했다고 한다. 6년 후인 50회 생일 때는 기필코 일어서서 걷고야 말겠다는 리브의 각오를 접하면서 그가 이제야말로 진정한 슈퍼맨으로 다시 태어났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 다운증후군을 극복하고 연극배우가 된 파스칼 뒤켄

잘 나가는 세일즈맨 해리의 차에 어느 날 생면부지의 청년이 무단승차한다. "나…나…나, 다운증후군이다."라고 소개하며 오르는 조르주. 영화 <제8요일>의 한 장면이다. 그 다운증후군 역에 감독 자코 반 도마엘이 파스칼 뒤켄을 캐스팅한 이유는 "다운증후군 역을 가장 잘 할 수 있는 건 다운증후군"이라는 것이었다. 

그는 연극무대에서 활동하던 뒤켄을 불러들였고, 이 시도는 성공하여 영화는 서로 다른 세계에 속한 두 남자가 서로의 세계를 이해하고 인정하며 행복을 발견하는 과정을 지극히 선량하게 그려내 세일즈맨 헤리역의 다니엘 오퇴유와 다운증후군 연극배우 파스칼 뒤켄이 나란히 칸영화제 남우주연상을 수상하게 하였다. 

다운증후군의 장애인이 영화제에서 남우주연상을 받았다는 사실은 실로 놀라운 사실이다. 우리의 현실에서는 어디 생각이나 할 수 있는 일인가! 시상식 직후 기자회견에서 뒤켄은 선배 배우이자 통역자가 돼버린 다니엘 오퇴유의 어깨에 고개를 비스듬히 기대고 기쁨에 들뜬 소리로 말했다고 한다. "매우…매우… 기쁘다. 고맙다." 

◇ 사라예보의 연극배우 튜릭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의 간판스타로 명성을 드날리던 튜릭. 그는 지난 92년 사라예보 내전 중 그의 집 근처에서 세르비아인이 쏜 총에 맞아 양다리를 잃었다. 그는 죽을 작정으로 두 달 동안을 보냈지만 가족의 도움으로 다시 일어서 휠체어를 타고 연극으로 돌아왔다.

얼마전 연극 '감옥에 갇힌 우부'에서 주연을 맡아 장애의 아픔을 딛고 배우로서의 삶을 재개한 그는 비극의 실체를 세계에 고발했다. 사라예보의 연극배우 튜릭, 그는 전장에 핀 인간승리다.

◇ 중국 최대의 역사가 사마천

사마천에 대한 자료는 매우 희박하여 자세히 기록하지 못했다. 그는 B C 145-86년까지 살다간 중국 전한시대의 역사가이다. 자는 자장(子長). 부친 사망 후 그 뒤를 이어 태사령(太史令)이 되었다. 기원전 104년 공손경 등과 함께 '태초력(太初曆)' 재정하여 후세 역세(曆歲)의 기초를 이루었다.

기원전 98년 한나라 장군 이능이 흉노에 항복한 것을 변호하다가 천자의 분노를 사서 궁형에 처해 있다가 2년 후 출옥하여 중서알자령이 되었다. 그가 평생동안 저술했다고 알려진 '사기(史記)'는 동양최고의 역사서로 평가되고 있다.

◇ 악성 베토벤

베토벤은 독일이 낳은 역사상 최고의 작곡가로 고전파 음악의 완성자이다. 할아버지와 아버지가 모두 음악가였던 만큼, 그는 어려서부터 음악에 뛰어난 재능을 보여 열 네 살 때 궁정 예배당의 오르간 연주자로 임명되었다. 그 후 열 일곱 살에 빈에서 온 발트시타인 백작의 추천으로 빈에 가서 하이든으로부터 음악을 배웠다. 그는 대단한 노력가였고, 겉으로만 아름답고 화려한 것은 싫어했으며 마음속의 감동을 중시하였다.

그러다 스물 여섯 살 때 병을 앓아 마침내 귀가 들리지 않게 되었으며, 서른두살 때는 유서를 쓰고 자살을 시도하기도 했다. 하지만 그는 그 괴로움을 극복하고 힘차게 살아갔기 때문에 그의 음악은 귀를 즐겁게만 하는 것이 아니라 듣는 사람에게 깊은 감동을 주는 대예술로 전해져 오는 것이다. 그가 청각장애인이 되고 난 후 작곡한 불후의 명곡 교향곡 9번 '합창'을 들어보라! 그것은 귀로 듣는 음악이 아니라 가슴으로 듣는 음악이다. 

◇ 낭만파 시인의 대명사 바이런

영국의 세계적 시인인 바이런은 1788년부터 1824년까지 살았다. 그는 런던의 귀족 집안에서 출생, 어려서부터 훌륭한 글재주로 주위의 칭찬을 받으며 성장했다. 켐브리지대학에 입학하여 역사와 문학을 전공했다. 

1807년 '게으른 날들'을 발표했으나 평판이 좋지 않았고, 졸업한 뒤 무질서한 생활을 계속하다 유럽을 여행하다 돌아와 견문기 '차일드 헤럴 등의 편력'을 출판하고서 일약 유명해졌다. 계속하여 '해적', '라라', '돈환' 등 유명한 작품을 계속 발표, 19세기 낭만파의 대표적인 존재가 되었다. 

항상 그리스 문화를 사랑했던 그는 23년 그리스 독립전쟁에 참여해 독립군에게 사기를 북돋아 주었는데 '오늘 나는 36세가 되었다'는 시를 마지막으로 말라리아 병에 걸려 사망했다. 그는 다리를 절었으나 언제나 자기 자신을 노래하고 생각하는 시를 쓴 시인으로서 자유롭게 살다 간 낭만주의자였다.

◇ 시각장애 수영선수 타마스 다르니

1988년 서울올림픽대회는 그 어느 때보다 장애인 선수들이 많았다. 헝가리의 타마스 다르니 선수는 수영에서 금메달을 땄는데 그는 시각장애인이다. 15살 때 친구가 던진 눈덩이가 왼쪽 눈을 강타한 것이 다르니에게 실명을 가져다 주었다. 7차례나 수술을 했지만 다르니는 왼쪽 눈이 움푹 파인 상처가 남아있다. 다르니는 1992년 바르셀로나 올림픽에서도 금메달을 획득하여 2연패를 했다.

◇ KO승으로 재기에 성공한 의족복서 크레이크 

의족의 복서가 KO승으로 재기해 미국 스포츠팬들에게 깊은 감동을 주었다. 그 화제의 인물은 크레이크 보자노프스키. 그는 오토바이 사고로 우측다리를 전달, 재기불능의 판정을 받았다. 다리를 다치기 전만 해도 그는 13전 전승 무패를 자랑하는 촉망받는 권투선수였다. 그러나 그는 절망을 딛고 고무로 된 의족을 하고 다시 권투에 도전 교통사고 후 18개월만에 의족의 복서로 재기한 것이다. 프로데뷔 14연승을 올린 그는 "장애인들에게 용기를 줄 수 있게 돼 한없이 기쁘다. 나는 오늘의 승리보다 나 자신과의 싸움에서 이긴 것에 더 큰 의미를 부여하고 싶다."고 말했다.

◇ 짧은 다리의 금메달리스트 조아큄 크루즈

LA올림픽 육상 800m에서 금메달을 딴 브라질의 조아큄 크루즈(21세)선수도 장애를 극복한 올림픽 영웅이었다. 크루즈는 태어날 때부터 오른쪽 다리가 2cm나 짧아 다리를 저는 장애인이었다. 그래서 그는 특별히 고안해서 만든 특수 운동화를 신고 뛰었다. 그는 수술만 하면 정상인이 될 수 있었지만 집안 형편이 몹시 어려워 수술은 커녕 병원 한 번 가보지 못하고 자랐다. 학교 수업이 끝나면 구두닦이와 껌팔이를 하며 어린 시절을 보냈던 그가 운동을 시작한 것은 배고픔을 달래기 위해서였다. 

처음 시작한 운동은 농구였다. 다니던 초등학교 농구 코트에서 절룩거리며 던진 볼이 링그물에 출렁거리는 것을 보고 배고픔을 잊곤 했다. 크루즈는 초등학교를 졸업할 무렵부터 달리기를 했는데 이 역시 배고픔 때문이었다. 그는 "운동을 하고 나면 더 허기가 왔지만, 달리는 동안은 배고픔을 느끼지 않아서 계속 달렸다"고 했다.

그의 달리기를 지켜 본 학교 체육 교사 올리베이라씨는 그가 불편한 다리에도 불구하고 훌륭한 육상선수가 될 수 있다는 판단에서 직접 지도를 하여 정상의 길에 오르게 했다. 올리베이라씨 밑에서 맹훈련에 들어간 크루즈는 급격히 기록 향상을 보여 17살 때 400,800,1500m에서 남미 신기록을 세우며 육상 스타로 떠오른 것이다. 

LA올림픽에서 금메달을 따고 나서 크루즈는 이렇게 말했다. '내가 첫 번째로 나의 조국 브라질에 금메달을 바치다니 꿈만 같다. 나는 매우 행복하다. 오늘 영국의 세바스찬 코 등 세계적인 강호들을 꺾고 우승했다. 나는 더욱 정진, 꼭 세계 기록을 갱신하겠다.' 크루즈는 비록 가난하지만 모 방송국이 2만 5천달러짜리 주택을 제공하겠다는 제의에 '그 돈으로 차라리 육상장이나 건설하라'고 한마디로 정중히 거절했고, 또 '카 퍼레이드 따위의 환영은 사양한다.'고 해서 그의 인간성을 돋보이게 했다.

◇ 메이저 대회 우승을 차지한 청각장애인 여자 골퍼 마르타 노스

미국 메이저 골프대회인 드 모리어클래식서 우승을 차지한 청각장애인 여자 골퍼 마르타 노스. 그녀는 지난 92년 귀신경을 다쳐 골프를 할 수 없다는 판정을 받았으나 불굴의 의지로 재기, 우승을 차지했다. 그녀는 우승이 확정된 순간 소감을 묻는 기자들의 질문에 "의사들은 거짓말쟁이였다."며 2년 동안의 병마와 고통을 이겨내고 얻은 승리의 기쁨을 만끽했다. 

지난 78년 프로에 데뷔, 지금까지 통산 2승밖에 올리지 못했던 그녀가 청각장애인이 된 후 오히려 메이저 대회에서 우승을 차지한 것은 시련에 부딪칠수록 강해지는 인간의 강인한 면모를 다시 한 번 느끼게 하는 사실이다.

◇ 전설의 복서 무하마드 알리

전설적인 복싱영웅 무하마드 알리가 제2의 전성기를 구가하고 있다. 선수생활때 입은 펀치드렁크의 후유증으로 파킨슨병을 앓고 있는 알리가 전세계 장애인들의 희망으로 부각되면서 상담과 위문활동, 강연으로 바쁜 나날을 보내고 있다. 

미시간주 작은 마을에 은거하고 있던 알리가 갑자기 부상한 것은 지난해 7월 '96애틀란타올림픽 개회식 때, 성화 최종주자로 선정된 알리가 온몸에 스며든 병마로 인해 뒤틀리는 몸을 버텨내며 성화에 점화하는 모습은 전 세계인들의 감동을 자아냈고 특히 동병상련의 장애인들에게는 희망을 심어 주었다. 

올림픽이 끝나고 그의 집에는 매일 수백 통의 전화가 걸려와 "당신 덕에 희망을 갖고 살게 됐다."며 감사의 뜻을 전하고 있다. 유에스에이투데이지가 소개한 한 일화는 같은 장애인들에게 그가 우상으로 자리잡았음을 보여준다. 

어떤 여자가 감격에 겨운 목소리로 "당신은 내 남편에게 영감을 주었다. 죽는 날만을 기다리고 있던 남편이 요즘 거리에서 나도 알리와 같은 파킨슨병 환자"라고 외치고 다니며 삶의 의욕을 보이고 있다고 전화를 한 것이다. 상황이 이쯤 되자 알리도 가만히 앉아 있을 수만은 없었다. 알리는 불편한 몸을 이끌고 이곳저곳을 누비며 '희망의 전도사'로서 활약하고 있다. 

그러나 알리는 장애인들이 아닌 굵직한 스폰서들이 요청하는 강연에는 상당한 몸값을 요구하고 있다. 행사장에 하루 모습을 나타내는데 10만달러(약 8천 2백만원) 외국으로 나갈 때는 최소한 22만 5천달러(약 1억 8천 4백 50만원)을 받고 있다. 알리는 마비된 근육을 힘들게 움직여 사람들에게 말한다. "내가 성화에 점화할 때 왜 울었죠? 나도 했는데 여러분은 왜 못합니까. 뭐든지 포기하지 마세요." 

◇ 소아마비 육상선수 루돌프

1960년 로마 올림픽에서 3개의 금메달을 휩쓸었던 미국의 여자 육상 선수 루돌프는 소아마비 장애인이었다. 그녀는 여자 100m,200m 그리고 400m 릴레이에서 3개의 금메달을 목에 걸어 3관왕의 영웅이 되었다. 루돌프는 그로부터 24년 지난 LA올림픽대회에 육상 경기 방송 해설자로 모습을 드러냈는데 그녀의 얼굴에서 세월의 흐름을 느낄 수가 있었다. 

루돌프는 한 인터뷰에서 이런 고백을 했다. "내가 월계관을 썼을 때, 나는 모든 것이 이루어졌다고 생각했습니다. 황홀했어요. 그러나 나에겐 아무 것도 남는 것이 없었어요. 프로로 전향한 클레이는 억만장자가 됐지만 나한테 돌아온 것은 연봉 4천 달러의 국민학교 체육 교사 자리였어요. 하지만 그건 대가족의 생계를 꾸려 나가기엔 너무나 박봉이었어요. 결혼도 두 번이나 실패했지요. 첫 번째 결혼은 내가 금메달을 따고 난 직후였어요. 남편은 내가 금메달리스트라는 그 이유만으로 나와 결혼했지요. 그 남자는 나를 이용해서 부자가 되는 꿈을 꾸었던 거예요. 결국 금메달도, 인생의 목표로 생각했던 결혼도, 얻은 그 순간일 뿐 영원할 수 없었어요."

현재, 그녀가 손수 지도하는 학생은 4백여 명으로 루돌프 자신이 경험했던 '영광에의 집착과 대중에 의한 자신의 망각 같은 시행 착오를 절대로 후진들에겐 남겨 주지 않을 것' 이라고 힘주어 말했다. 

◇ 두 팔 없는 미식축구선수 로니 웨스트

두 팔이 없는 장애를 딛고 미식축구선수가 된 로니 웨스트가 살아온 4반세기의 삶은 끊임없이 자기와의 싸움이었다. 그는 어머니의 약물복용으로 태어날 때부터 두 팔이 없이 태어났다. 그러나 그는 그런 장애에도 불구하고 여섯 살 때부터 수영을 하여 10년간 장애인 체육대회에 출전했으며, 미식축구사상 처음으로 두 팔이 없는 미식축구선수가 되었다. 

장애인수영대회에서 5개의 세계기록을 보유한 웨스트는 "나는 두 팔이 없다. 그렇지만 스포츠를 좋아하며 내 스스로 만능 스포츠맨으로 자부한다."라고 거침없이 말한다. 미식축구선수가 쉽지만은 않았다. 포지션이 키커라고 했지만 가끔 태클을 해야 했고 필드골 시도도 봉쇄해야 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그를 가장 괴롭히는 것은 역시 팔 없는 장애인을 키커로 내세웠다는 상대선수들의 비난이었다. 

그의 동료들은 그에게 격려를 아끼지 않았으며, 그는 경기를 거듭할수록 자신감을 가졌다. 그는 "이 세상에는 왼손잡이가 많이 있는데 나는 왼발잡이다."는 농담도 하는 자신에 찬 삶을 살고 있다. 

◇ 금메달 열 개의 소아마비 선수 레이 유리

올림픽 사상 가장 많은 금메달을 차지한 선수는 소년 시절을 휠체어 위에서 지낸 장애인이었다. 1873년 미국 인디애나 주에서 태어난 레이 유리는 소아마비에 걸려 휠체어 위에서 지내다가 10살때부터 몸을 단련하기 시작했다. 달릴 수 없었던 유리가 할 수 있는 운동이란, 서 있는 자세에서 껑충 뛰어오르는 일이었다. 당시에 올림픽 종목에는 선 자세에서 치뜨는 높이 뛰기, 넓이 뛰기, 세단 뛰기가 있어 유리의 희망을 키워 주었다. 

1900년 파리. 제2회 올림픽에 26살의 나이로 출전한 유리는 이 3개 종목에 우승했고, 1904년 세인트 루이스에서의 제3회 대회에서도 역시 이 3개 종목을 모두 2연패했다. 그리고, 중간 대회(1906년 아테네)와 그로부터 2년 뒤인 1908년의 제4회 런던 대회에서도, 종목이 없어진 선 자세에서의 세단뛰기를 제외하고, 나머지 2개 종목에서 각각 우승함으로써 연속해서 금메달 10개를 차지했다.

◇ 금세기 최고의 절단장애 여자스키선수 다이애나 골든

한쪽 다리를 절단한 불행을 딛고 미국 최고의 여자 스키선수로 우뚝서 세계인들을 감동시켰던 다이애나 골든. 그녀는 장애를 극복하고 일어선 인간승리의 화신으로 오랫동안 전세계 매스컴들의 칭송의 대상이 돼 왔으며 그녀의 스토리는 '스키에의 재도전'이란 제목으로 영화화 돼 우리 안방극장에도 소개된 적이 있다. 

미국 매사추세츠주 링컨태생으로 다섯 살 때부터 스키를 타기 시작한 다이애나는 열두 살때인 75년 골수암으로 오른쪽 다리를 잘라내야 했으나 각고의 노력으로 설원에 다시 돌아와 비장애인들도 넘보기 힘든 놀랄 만한 활약상을 보였다. 

외발스키로 슬로프에 다시 선 그녀는 82년 첫 출전한 세계장애인선수권대회에서 첫 금메달을 목에 건 이래 미국 장애인스키선수권대회를 10차례, 세계장애인스키선수권대회를 19차례나 석권했으며, 88년 캘거리 동계올림픽에서 시범 종목으로 채택된 장애인 대회전에서 우승 등 장애인 스키부문의 독보적인 존재로 군림해 왔다. 

그녀는 장애인용 장비가 아닌 일반 장비로 이러한 성적을 올려 86년 미국스키협회가 매년 최우수선수에게 주는 베크상을 받았으며, 88년에는 '스키 레이싱'지에 의해 올해의 알파인 여자스키선수로 뽑혔다. 그리고 같은 해에 정상인 스키선수들을 제치고 미국 올림픽위원회로부터 '올해의 여자스키선수'로 지목되는 영광을 누렸다. 

그녀는 자신에게 따라 다니는 '용기있는'이란 수식어를 혐오한다. 그 단어가 모든 장애인들의 능력을 얕잡아 보는 그릇된 인식에서 비롯된 것이라 생각하기 때문이다. 다이애나의 스토리는 과장해서 말하기 좋아하는 미국인들 사이에서는 이미 하나의 전설로 떠받들어지고 있다.

◇ 영혼의 목소리 호세 펠리치아노

시각장애인 가수 호세펠리치아노는 원래 푸에르토리코의 빈농의 아들로 미국에 이민 와 뉴욕의 스페인 이민촌 빈민굴에서 성장했다. 어릴 적부터 아코디언과 기타를 치기 시작한 그는 일반 시각장애인들이 앞을 못 보는 대신 다른 감각이 발달해 있듯이 그 역시 천부적인 음악소질로 인해 매우 빠른 음악적 성장을 거듭해 열 일곱 살 때부터 공연을 다니기 시작했다.

그가 레코드로 데뷔한 것은 1963년부터였다. 물론 처음에는 그의 노래 대부분이 스페인어였기 때문에 라틴 아메리카 쪽에서 인기가 있었고, 그가 정작 미국에서 그의 이름을 드날린 것은 1969년 팝챠트 3위까지 오른 그룹 DOORS의 히트곡을 터뜨리기 시작하는 그는 TV 인기시리즈 주제가와 영화음악 등으로 인기의 절정에 오른다. 그는 현재까지 30여년 넘은 가수생활 동안 레코드 발표, 그리고 끊임없는 순회공연으로 정력을 과시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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onnews (onnews@onnews.or.kr)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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